[리오 브라보] 얘기가 나오기에 올려놓는다. http://www.film2.co.kr/column/roughcut/roughcut_final.asp?mkey=103 김영진의 러프컷 - 한국의 대중영화는 어디로 가나 Film2.0 제 229 호 (2005.05.03 ~ 2005.05.10) 74~75쪽.
서울아트시네마 재개관 행사로 ‘시네필의 향연’이란 이름이 붙은 특별 영화제에 상영되는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를 오랜만에 다시 봤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단골로 틀어주던 서부극이었는데 유행이 지난 요즘은 보기 힘든 고전이 된 이 영화를 스크린에서 다시 보는 감흥이 묘했다. 포복절도할 장면들을 적당히 깔아두면서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전횡을 일삼는 한 목장주에 맞서 마을을 지키려는 남자들의 영웅담 속에 남자들의 의리와 자존, 그리고 그들 중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로맨스를 그린 <리오 브라보="">는 보고 나면 세상이 밝고 명랑해진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하는 대중 영화였으나 그 만듦새는 요즘 대중영화 기준으로는 둔탁하고 진중했다. 당대의 가장 인기 있는 오락 영화가 현재의 감성으로는 예술영화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때 속도감 있는 영화를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하워드 혹스의 연출 감각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다소 느리다. 캐릭터를 설명하는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촘촘하게 얽힌 플롯도 지금 기준으로는 꽤 복잡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리오 브라보="">를 보러온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영화평론가이자 아트시네마의 프로그래머인 김성욱 씨의 말로는 할리우드 고전 영화에는 언제나 관객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이곳의 현재 영화광들은 유럽영화들에 더 호감도가 높지만 실제로 할리우드 클래식과 유럽 예술영화의 간극이 그리 커 보이지는 않는다. 오늘날에는 두 유형의 영화 모두 집중력을 요하는 나름의 결을 지니고 있다. 현대 할리우드영화는 점점 최소한의 집중을 요하지 않는 완성도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혹스의 영화가 요즘 감각으로 느리다고 느껴지는 건 화면 호흡이 상대적으로 긴 탓도 크다. 혹스의 영화는 프랑스 비평가 앙드레 바쟁이 명명한 ‘아메리칸 쇼트’로 특징 지어진다. 두 명의 등장 인물이 앉아 있을 때는 그들의 가슴 부근에서 화면을 잡고, 그들이 서 있을 때는 무릎 근처 범위에서 화면을 잡아, 두 사람을 모두 카메라에 담되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이 거리를 유지하며 연기의 모든 세부를 관찰하는 것을 추구한 것이 하워드 혹스의 연출 태도였다.
앙드레 바쟁은 하워드 혹스의 이 화면 구도가 지극히 경제적인 효과를 거둔다고 평가했다. 클로즈업과 미디엄 쇼트와 풀 쇼트를 함께 아우르며 세 개의 화면으로 묘사할 것을 하나의 화면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표현의 경제성 추구에 가장 성공한 극영화 양식을 확립한 것이 할리우드 고전 영화이며 하워드 혹스 감독은 그중 가장 특출했고 바쟁은 그런 혹스의 스타일의 대표성을 가리키기 위해 ‘아메리칸 쇼트’란 말을 집어낸 것이다. 이런 스타일로도 혹스는 당시로선 대단한 화면의 속도감을 추구했는데 그건 주로 빠르게 오가는 대사의 속도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존 웨인과 앤지 디킨슨이 연애 감정으로 실랑이 하는 장면들의 속도감은 빠르게 미끄러지고 빗나가며 아슬아슬하게 겨우 전달되는 그들의 말싸움에서 나온다. 나중에 쿠엔틴 타란티노가 효과적으로 흡수한 이 말의 속도는 안정감 있게 배치된 화면 구도 속에서 그야말로 한 바탕 연기의 잔치를 보는 기분으로 영화를 감상하게 만든다.
<리오 브라보="">를 보고 나오며 현대적인 대중영화의 꼴은 무엇일지를 생각했다. 현재 양산되는 하이 컨셉 영화의 질은 근본적으로 혹스 시대의 것과는 거리가 멀다. 화면 크기와 사운드의 질을 빼면 하이 컨셉 영화는 텔레비전 영상과 훨씬 가까운 것이다. 나름의 야망이 있는 창작자들이라면 텔레비전 스타일에 투항하는 길을 걸어갈 리가 없다. 할리우드 영화광이었던 누벨바그의 일부 감독들은 할리우드영화의 상투형을 끌어온 후에 그걸 제멋대로 해체함으로써 다른 미학을 창조했다. 뉴아메리칸 시네마 세대의 마틴 스콜세지와 같은 감독들은 장르의 표준적 관습을 지키는 척하면서도 카메라가 설레발을 치고 다니는 왕성한 스타일로 감독의 예술적 자의식이 이야기를 지배하는 유럽영화의 영향을 완벽하게 수용했다.
지금 한국에서 생산되는 영화들은 어떤가. 만우절 대격돌로 불렸던 <주먹이 운다="">와 <달콤한 인생="">은 현재의 한국영화 가운데 최고의 수준을 대변할 수 있는 면면에도 불구하고 대중 영화의 기준에 부합하는 실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들 영화를 비롯해 올해의 화제작이었던 <공공의 적="" 2="">, <말아톤>은 물론이고 <혈의 누="">까지 포함해, 기획으로만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연출자의 자의식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투영된 영화들을 생각해보면 진정으로 질과 재미를 갖춘 대중 영화야말로 참 만들기 어려운 게 아닌가라는 회의에 빠진다.
<공공의 적="" 2="">는 감독의 자의식이 가장 보이지 않게 억눌려진 대중영화였고 그 결과 무모할 정도로 단순화된 내러티브로 악에 대립하는 선한 의지의 승리를 강조했다. 옛날 할리우드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고색창연한 권선징악의 믿음을 내세운 이 영화는 설경구의 에너지에 기대어 사회악에 대한 분노라는 하나의 감정만으로 내러티브를 쭉 밀고 갔다. <말아톤>은 불우한 주인공의 자그마한 성공담이라는 전형적인 스토리의 함정을 굳이 피하지 않으면서도 부분적으로는 매우 세밀한 시각적 묘사를 통해 전형적인 껍질을 깨고 음미할 만한 영화적 살을 입혔다. 조승우가 연기한 주인공이 달리는 묘사가 특히 그랬다. 살아가는 것의 감각을 생생하게 재현한 기교 덕분에 딱딱한 이야기의 껍질을 까 보이는 것이다. 이들 영화와 마찬가지로 영화 장르의 관습을 거부하지 않았던 <주먹이 운다="">와 <달콤한 인생="">은 좀 다르다.
두 남자의 인생 역정을 매우 전형적인 구도로 풀어낸 <주먹이 운다="">는 클라이맥스에서 감독의 자의식을 강하게 밀어붙인다. 곤경에 처한 주인공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가족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축으로 에피소드를 짠 끝에 마침내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복싱신인왕전 결승에 오른 링 위의 두 남자를 보여 주면서 카메라는 그 경기의 상당 부분을 가족들의 시선을 배제한 채 찍는다. 관객이 가족의 입장에서 감정 이입의 상승 곡선을 더욱 탈 수 있었던 효과적인 극정 장치를 마다하고 감독 류승완은 링 위에서 자기 육체의 한계를 견디는 두 남성의 몸에 카메라의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들의 피로는 관객의 피로로 느낌상 옮겨오고 그때까지 축적된 가족의 입장을 거친 그들 인생에의 공감은 약간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 관찰된다. 예전의 칼럼에서 지적한 대로 이것이 감독 류승완의 고집이다. 그가 이 분야에서 더 정진한다면 더욱 더 근사한 작가영화의 경로를 개척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중 영화적 재미 면에서 <주먹이 운다="">의 클라이맥스는 영악한 선택은 아니었다. 류승완은 여전히 장르의 관습과 자신의 예술적 의지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점을 찾아내지는 못한다.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세련된 미감을 보여준 <달콤한 인생="">에 이르러 당혹감은 더욱 커진다. 주먹만한 이야기를 몸체만큼 불린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거의 텅 비어 있다. 이야기의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체계적으로 회피한 끝에 이 영화는 이병헌이 연기하는 주인공 선우의 입을 빌어 관객이 감독에게 묻고 싶었던 말을 하게 한다.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 <달콤한 인생="">에서는 왜가 빠져 있거나 그 질문을 과감하게 무시하고 있다. 인과관계의 고리를 고의로 흐트러트린 곳에서 김지운 감독은 시청각 잔치의 향연을 펼친다. 음식으로 치자면 양은 아주 작고 냄새는 향긋하며 정작 먹어본 맛도 강한 자극을 품고 있기는 한데 씹히는 것이 전혀 없는 스테이크다. 시초와 결말이 없는 이야기의 과정에서 세세한 질감을 뽑아낸 장인정신의 숙련도는 또한 이야기의 진공을 가리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관객을 더 황당하게 만든다. 누아르의 시각 스타일을 가져왔지만 누아르의 이야기 토대를 제공했던 범죄 소설 유의 내러티브 구조는 확실하게 제거된 신종 유형의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대중 영화의 기질은 늘 변하고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창작자들의 비전도 달라지고 있지만 한국영화는 아직 교과서적인 모범 답안을 갖고 있지 못하다. 1년만 지나면 흉해서 차마 보기 힘든 변칙적인 기획 영화들의 틈바구니에서 나름의 역량을 갖춘 창작자들이 장르의 관습을 빌려 자신의 비전을 담는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작업은 아니라는 것을, 게다가 자기 식의 스타일을 요즘 감각에 맞춰 창조한다는 것이 지난한 과제라는 것을 올해 상반기 한국영화의 어떤 경향은 보여 준다. 이 영화들이 어느 쪽으로도 만족하기 힘든 것은 곧 이 영화들이 담고 있는 정서적 내용물의 정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가 상영되던 시대는 영화 창작자에게나 관객에게나 좋은 시대였다. 선은 이기고 악은 패배하며 영웅은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가상의 믿음을 나눠 가진 채 편안하게 극장에 앉아 영화를 감상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정보의 홍수를 맞고 있는 요즘에는 더 복합적으로, 더 빠르게 관객에게 호소하는 내용과 스타일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할리우드영화와는 다른 품질의 대중 영화 영토를 건설하려는 한국의 영화계에서 촬영과 미술을 비롯한 기술적 역량은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으나 그 솜씨에 기초해 내놓는 생산물은 아직 정체가 모호해 보인다. 블록버스터, 예술영화, 장르 영화의 형상이 어지럽게 뒤섞인 영화들이 나란히 늘어선 가운데 뭔가 독특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에너지 또한 머금고 있는 그 영화들을 대하면서 아직 확실한 꼴을 갖추지 못한 한국의 대중 영화의 모범은 무엇일지를 궁금해 하게 된다. 리오>달콤한>달콤한>주먹이>주먹이>달콤한>주먹이>말아톤>공공의>혈의>말아톤>공공의>달콤한>주먹이>리오>리오>리오>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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