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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엔케의 2주기가 되었다. 작년 이맘때 엔케의 1주기를 맞이하여 분* 게시판에 올렸던 글을 다시 여기 옮겨 둔다. 로베르트 엔케 1주기를 맞아 영문 위키를 번역했습니다. 작년 이맘 때 정말 며칠을 울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엔케의 명복을 빕니다.
로베르트 엔케 로베르트 엔케 (1977년 8월 24일 - 2009년 11월 10일)는 독일의 축구 골키퍼였습니다.
엔케는 바르셀로나, 벤피카, 페네르바체와 같은 유럽 여러 나라의 주요 클럽에서 뛰었으나, 고국인 독일의 분데스리가 클럽인 하노버 96에서 가장 많이 경기를 치렀습니다.
2007년부터 2009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독일 국가대표팀에서 8경기에 출전했고, 유로 2008 준우승을 차지했던 독일 국가대표팀의 일원이었습니다. (역주: 유로 2008에서 출장은 하지 못 했습니다.)
2009년 11월 10일, 엔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엔케가 2010년 월드컵 독일 대표팀의 No.1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생활 로베르트 엔케는 부인 테레사와 결혼하여 딸 라라가 있었지만, 라라는 선천성 심장 결함(발육부전성 좌심 증후군)으로 2006년 9월 17일 2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9년 5월 엔케 부부는 여자 아기 라일라를 입양했습니다. 엔케는 사망할 때까지 Neustadt am Rübenberge 부근 Empede의 작은 농장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엔케는 아내와 함께 여러 동물 권리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들에게는 많은 반려동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피 산업에 반대하는 PETA 캠페인 광고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클럽 경력 엔케는 예나에서 태어나 코스페다에서 자랐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조부모의 정원에서 처음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초기 경력 엔케는 고향의 클럽인 칼 자이스 예나의 유스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1995-96 시즌 중에 1군으로 올라왔습니다. 1995년 11월 11일, 2부 리가에서, 그는 장차 자신이 뛰게 될 하노버 96을 상대로 프로 데뷔를 했습니다. 원래 선발 골키퍼였던 마리오 노이만이 3경기만에 14골을 허용하자 감독 에버하르트 포겔이 노이만을 제치고 어린 나이의 엔케를 발탁하여,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엔케는 1995년 11월에 3경기에 출장했지만, 이 기간 후 노이만이 다시 팀에 복귀했고 엔케는 그 시즌에 1군에 다시 출장하지 못 했습니다.
사실 엔케는 칼 자이스 예나에서 다시는 출전하지 않게 되었는데, 1996년 여름 분데스리가 클럽인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와 계약했기 때문입니다. 엔케는 여기에서 첫 두 시즌을 클럽의 U-23팀에서 보냈으며, 하부 리그에 출전하며 재능을 연마했습니다.
엔케에게 1998-99 시즌 직전 기회가 왔습니다. 묀헨글라드바흐의 전설적인 골키퍼 우베 캄프스가 부상을 당했고, 신임 코치 프리델 라우쉬는 엔케가 드디어 묀헨글라드바흐 데뷔를 할 수 있는 큰 기회를 주었던 것입니다. 1998년 8월 15일, 그의 첫 분데스리가 경기에서 묀헨글라드바흐는 샬케 04를 3:0으로 꺾고 리가 순위 1위가 됩니다. 그러나 이 순위는 오래가지 못 했습니다. 엔케가 최선의 활약을 펼쳤지만, 묀헨글라드바흐는 10월에 리그 최하위로 떨어졌고 결국 강등당할 때까지 계속 최하위에 머물렀습니다(11월부터는 라이너 본호프가 감독이었습니다).
해외 진출 묀헨글라드바흐는 내리막길이었지만, 엔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프로 선수로서 처음으로 시즌 전체를 경험한 엔케는 곧 포르투갈의 벤피카와 계약을 했습니다. 당시 벤피카는 같은 독일인인 유프 하인케스가 감독이었고, 하인케스는 곧 엔케를 주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엔케의 포르투갈 시절은 파란만장했습니다. 그가 있던 3시즌 동안 감독이 3번 바뀌었고, 리그 우승을 하지 못 했으며 클럽 역사상 리그 최하위(6위)를 경험했고, 재정난으로 선수들의 급료가 늦어지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이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엔케의 활약은 엔카르나도스(Encarnados. Reds라는 뜻으로 벤피카의 별명) 팬들의 감탄을 얻어냈고, 아스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같은 클럽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벤피카와의 계약 협상이 깨진 후, 엔케는 스페인의 거인 바르셀로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2002년 여름 3년 계약으로 바르셀로나로 자유 이적했습니다.
엔케는 로베르토 보나노에 밀려 후보 골키퍼였기에 - 그는 나중에 바르샤에서의 골키퍼의 자리를 "유럽에서 가장 어려운 골키퍼 자리"라고 불렀습니다 - 누 캄프에서의 삶은 엔케에게 힘든 것이 되었습니다. 2002년 9월 11일 그의 바르셀로나 데뷔전은 팀이 스페인컵 1라운드에서 3부 리그 팀인 노벨다 CF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함으로써 기록을 남기게 되었고, 팀 동료였던 프랑크 드 보어는 팀이 탈락한 것에 엔케가 한 몫했다고 비판했습니다. 2003년 3월 2일 2-2 무승부로 끝난 오사수나와의 경기에 교체로 들어가 20분 출장하면서 그는 라 리가를 짧게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기간 중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 경기에서 브뤼헤와 갈라타사라이를 상대로 2경기에 출장하면서 유럽컵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음 시즌, 루이스 반 할 후임으로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뤼스튀 레치베르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는 협상의 일부로서 엔케는 터키의 페네르바체로 - 당시 페네르바체의 감독은 독일인 크리스토프 다움이었습니다 - 임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겨우 한 경기, 2003년 8월 10일 이스탄불스포르에게 0-3으로 끔찍한 패배를 당한 경기에 출장을 하면서 그의 경력은 계속 사그라들었습니다. 페네르바체 팬들은 쓰라린 패배를 그의 탓으로 돌리며 그에게 경기 중에 불쏘시개와 병을 던졌습니다. 이런 일을 겪은 엔케는 즉시 팀을 떠났고 1년 예정이었던 임대를 중지하고 스페인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으나 1군에서는 뛰지 못한 채 4개월을 보낸 후, 엔케는 2004년 1월, 스페인 2부 리그로 내려가 CD 테네리페에 임대되어 그 시즌의 나머지를 보냈습니다. 여기서 그는 좋은 경기력을 보여 팬들과 다른 클럽들의 찬사를 받으며 상승세를 탔습니다.
분데스리가 복귀 CD 테네리페에서 폼을 되찾고 나서, 엔케는 고국으로 돌아와 2004년 7월 자유이적으로 분데스리가의 하노버 96과 2년 계약을 했습니다. 그는 팀의 No.1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고 키커지에서 동료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리가 최고의 골키퍼로 뽑히면서, 그의 경력은 최고의 성공과 안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활약 덕에 엔케는 더 큰 클럽, 특히 VfB 슈투트가르트로 이적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6년 12월, 그는 2009-10 시즌 말까지 하노버 96과 계약을 연장하면서 이러한 전망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2007-08 시즌 그는 팀 동료들에 의해 팀의 주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후 그의 경력 내내 그는 하노버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는 2008-09 시즌 다시 최고 골키퍼로 뽑혔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시즌이 그가 시즌 전체를 뛴 마지막 시즌이 되었습니다.
엔케는 하노버 96에서 총 180회 출장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2-2로 비긴 2009년 11월 8일 함부르크와의 홈 경기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겨우 이틀 전이었습니다.
국가대표 경력 엔케는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에서 뛰던 1997년, 독일 U-21팀에 선발되어 처음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았고, 총 15회 출장하며 그 시즌의 나머지 동안 No.1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의 실력에 확신을 하게 된 전 국가대표팀 감독인 에리히 리벡은 그를 1999년 컨페더레이션 컵 출전 팀의 일원으로 포함시켰지만, 그는 경기에 출장하지는 못 했습니다.
이후 그가 독일을 떠나면서 그의 국가대표 경력은 가라앉았고, 분데스리가로 돌아올 때까지 그는 다시 국가대표팀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 명성이 커지면서 위르겐 클린스만이 이끄는 2006년 월드컵 독일 국가대표팀의 후보로 떠오르기도 했지만, 결국 팀에 뽑히지는 못 했습니다. 곧이어 새로운 감독 요아힘 뢰브가 이끄는 국가대표팀에서 그는 국가대표팀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고, 그루지아와의 친선 경기에 뽑혔으며, 주전 골리였던 옌스 레만이 독감에 걸리자 사이프러스와의 경기에도 뽑혔습니다.
그는 2007년 3월 28일 뒤스부르크에서 열린, 독일이 0-1로 패한 덴마크와의 친선 경기에서 마침내 독일 성인 국가대표팀 데뷔를 했습니다. 몇 경기를 더 치른 후, 그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서 열리는 유로 2008 독일 국가 대표팀에 뽑혔습니다. 독일이 준우승을 차지한 이 대회에서 엔케는 출전은 하지 못 하고 벤치를 지켰습니다.
전 No.1 옌스 레만이 유로 2008 이후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면서, 엔케는 No.1의 자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준비가 되었고, 2010년 월드컵 예선 몇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그러나 2008년 10월 그는 러시아와의 월드컵 예선 경기를 앞두고 국가대표팀에서 훈련 도중 왼손 손배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수술을 받은 후 그는 2개월 동안 출전을 하지 못 했습니다. 2009년 1월 그가 복귀하면서, 그는 다시 국가대표팀의 No.1 골키퍼가 되었습니다.
2009년 9월과 10월에, 엔케는 캄필로박터 감염 때문에 다시 몇 주간 출전을 하지 못 했습니다. 그는 10월 하순까지도 감염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 했고, 그 결과 그는 그의 사망 당시 독일 국가대표팀이 준비 중이었던 칠레와의 친선 경기에 부름을 받지 못 했는데, 엔케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 경기는 그에 대한 추모의 표시로서 취소되었습니다.
엔케는 세상을 떠나기 전 국가대표팀 경기 8경기에 전 시간 출전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는 그가 무실점을 기록한 2009년 8월 12일 아제르바이잔과의 경기였습니다.
죽음 2009년 11월 10일, 32세의 나이에 엔케는 Eilvese, Neustadt am Rübenberge의 철도 건널목에서 지역 급행 열차에 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경찰은 유서가 발견되었음을 확인했으나 자세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미망인인 테레사는 엔케가 6년 동안 우울증에 시달려왔으며 정신과의사에게 치료받고 있었음을 밝혔습니다. 딸 라라가 2006년에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이 상실감을 이겨내기 위해 애썼습니다.
이 뉴스가 알려지자 많은 팬들이 즉시 하노버 96의 홈 경기장인 AWD-아레나로 모여들어 꽃을 놓고 촛불을 켰으며 애도의 글을 남겼습니다. 그의 이전 클럽인 바르셀로나는 그날 밤 경기 시작 전 1분간 묵념의 시간을 가졌으며, 이어진 주말에 열린 몇몇 국가대표팀 경기들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추모의 표시로서, 독일 국가대표 축구팀은 11월 14일로 예정되어 있던 칠레와의 친선 경기를 취소했습니다. 2009년 11월 21-22일에 열린 모든 분데스리가 경기, 그리고 포르투갈 컵 벤피카의 경기에서 1분간의 묵념이 있었습니다. 독일 대표팀은 예정되었던 훈련 일정 및 모든 인터뷰도 취소했습니다. 독일 국가대표팀의 매니저인 올리버 비어호프는 "우리는 몹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할 말을 잃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009년 11월 15일, AWD-아레나에서 열린 엔케의 추도식에는 4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흰 장미로 덮인 엔케의 관은 그의 하노버 96 팀 동료들 6명이 운구했습니다. 그는 하노버 외곽 노이슈타트에, 딸의 묘 옆에 묻혔습니다. 하노버 96의 선수들은 전 팀 동료에 대한 그들의 추모의 표시를 더하기 위해 2009-10 분데스리가 시즌의 나머지 기간 동안 동그라미를 친 숫자 1을 저지의 가슴에 달았는데, 이는 조용한 헌사로서 DFL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로베르트 엔케 재단 독일축구협회(DFB), 하노버 96, 독일축구리그(DFL)는 엔케를 추모하여 재단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 재단은 선수들의 정신 건강을 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덧붙임
엔케에 대해 우리나라에 퍼져있는 오해(?) 몇 가지를 바로잡고 싶어 덧붙입니다.
1. 엔케가 우리 나라에 널리 알려진 건 2010년 월드컵 독일 : 호주 경기 후일 겁니다. 그 경기 당시 독일 벤치에 엔케의 유니폼이 놓여 있었다면서 그 유니폼의 사연을 소개하는 식의 글들이 인터넷에 많이 올라왔었죠. 그런데 정말 그 경기에서 독일 벤치에 엔케의 유니폼이 놓여 있었는지요? 전 그 경기 생방송으로 보진 않았습니다만 동영상으로 다시 돌려봐도 그런 장면은 안 보이던데요. 정말로 보신 분 계십니까?
그리고 그 때 인터넷에 올라왔던 여러 사진들, 벤치에 놓인 유니폼 사진, 발락이 벤치에 유니폼을 놓는 사진, 벤치의 선수들 사이에 유니폼이 놓여있는 사진들은 이번 월드컵 호주전 사진이 확실히 아닙니다. 엔케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후 열렸던 2009년 11월 18일의 독일:코트디브와르 평가전 때의 사진이지요. 이건 http://www.daylife.com/search/photos/3/grid?q=november+18+2009+enke 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2. 엔케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 전에 'Lara Papa kommt' (라라, 아빠가 간다)라는 메시지를 딸의 무덤에 남겼다는 글도 있었는데 이 말은 어디서 나온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찾아본 독일 사이트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엔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라라의 할머니(엔케의 부인이라는 곳도 있더군요)가 석판에 저런 글을 써서 라라의 무덤에 남겨놓았다는 기사를 몇 군데서 봤을 뿐입니다.
3. 엔케가 세상을 떠난 후 하노버 96의 등번호 1번이 영구결번되었다고 알고 있는 분들이 있는데, 아닙니다. 영구결번을 논의한다는 말은 있었지만, 10/11 시즌이 시작되면서 하노버 96의 등번호 1번은 플로리안 프롬로비츠의 것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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