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 - 공백과 비약에 관하여 존 포드, 1940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4-07-30조회 10719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 (1940) - 공백과 비약에 관하여

존 포드의 ‘영예의 시기’(1939~1941)에서 마지막으로 다룰 영화는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1940)이다. 자신의 땅에서 유배된 농부 가족의 이야기. 대공황의 여파와 오클랜드 지역의 오랜 가뭄 그리고 땅의 소유권을 독점한 은행과 대기업이 톰 조드의 가족과 이웃 소작농들을 축출한다. 서부로 떠나온 그들을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착취와 무자비한 공권력이다.

존 스타인벡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이 영화는 <밀고자 The Informer>(1935)에 이어 그에게 두 번째 오스카 감독상을 안겼으며 미국 평자들 사이에서 포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종종 언급된다. AFI(The American Film Institute)는 이 영화를 영화사의 걸작목록에서 23번째 자리에 올려놓았고, 앤드루 새리스 Andrew Sarris는 이 영화가 “한 사람의 스크린 스토리텔러를 미국의 계관시인으로 바꿔놓았다”고 극찬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대릴 자눅 Darryl F. Zanuck
 
그럼에도 <분노의 포도>를 말하는 것은 망설여졌다. 다루기 까다로운 점이 몇 가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이 영화가 존 포드의 영화로는 드물게 메시지 중심적인 영화로 보인다는 점과 연관된다. 존 포드는 원작 소설의 사회적 분노와 정치적 발언을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분노의 포도>는 사실상 좌파정치학의 메시지를 직접 드러낸 유일한 존 포드 영화이다(이 때문에 2차대전 이후 매카시즘 시기에 포드와 스타인벡은 친공산주의 혐의로 조사대상이 되기도 했다). 보수파로 알려진 존 포드가 이 영화에 얼마나 자신의 창의성과 진정성을 쏟았는지 가늠하기란 어렵다.

평자들이 다루기에 더욱 까다로운 또 다른 문제는 제작자 대릴 자눅의 깊은 연루다. 원작 소설의 판권을 사고 제작의 전 과정을 총지휘한 자눅은 존 포드의 용인 아래 이 영화의 라스트 신을 직접 연출했고, 자신이 제작한 다른 영화에서도 그랬듯이 편집에 깊이 관여했다. 원작이 현실을 과장하고 있지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 자눅이 이주민 수용소에 위장 이주민을 파견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요컨대 <분노의 포도>에는 포드와 자눅의 공동연출의 성격이 어느 정도 있다고 봐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를 직접 다루기는 쉽지 않다. 존 포드의 정치학에 대해선 간략하게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한 사람의 작가를 말하는 데 있어 그의 정치학은 평자의 호기심의 대상이긴 하지만 주된 이슈는 될 수 없다. 발자크의 소설이 그의 부르주아 정치학을 배신하듯, 작품과 작가의 정치학은 종종 어긋난다. 더구나 이 연재의 2회에서 살펴봤듯이 존 포드처럼 종잡을 수 없는 모순과 복합성의 존재라면, 그의 정치학과 작품의 내면적 연관을 밝히려는 시도는 헛된 짓일 것이다. 다만 그의 작품이 거의 예외 없이 비판적이고 염세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고전적 서부극의 완성이라 일컬어지는 <역마차>에서조차 창녀와 무법자는 공동체에 통합되지 않고 문명의 저편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로저 에버트의 표현대로 이 영화가 ‘맑시즘과 초월론의 조우’라고 해도 포드가 자신의 신념을 벗어난 영화를 만들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I’ll be there speech’
 
<분노의 포도>가 우리를 당황케 하는 것은 원작과 공유한 계급정치학이 아니라, 정돈된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일종의 정치적-종교적 강론이 서사를 매듭짓는다. “이제 네 소식을 어디서 들을 수 있니?”라는 엄마의 슬픈 물음에 톰 조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전 주위의 어둠 속에 있어요. 어머니가 계신 곳엔 어디에나, 가난한 자의 투쟁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경찰의 부당한 폭력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분노의 함성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아이들의 웃음과 굶주림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사람들이 제 손으로 기른 것을 먹고 제 손으로 지은 집에서 사는 곳엔 어디에나 있을 거예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사무치게 구슬픈 노래 ‘The Ghost of Tom Joad’(1995)에도 인용되는 이 유명한 ‘I’ll be there speech’는 시적이며 마음을 흔든다. 하지만 이것은 포드의 방식이 아니지 않은가. 존 포드는 “영화는 말(words)이 아니라 그림(picture)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믿었던 사람이고, 현장에서 그가 하는 일 중 하나는 스크립트를 찢어내 대사를 줄이는 일이었다. 소설의 대사를 거의 그대로 옮겨온 이 감동적이지만 장황한 강론은 전과자이자 농부인 주인공의 말이라고 믿기 힘들며, 결말부에서 갑작스럽게 쏟아진다. 이 비약을 어떻게 봐야 할까.
 Bruce Springsteen - ‘The Ghost of Tom Joad’
 
우리는 여기서 몇몇 예외(<젊은 날의 링컨> <도망자> <웨건 마스터> 등)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존 포드 영화가 한 개인의 온전한 사적 창작물이 아니라 프로듀서가 주도하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산물이라는 당연하지만 잊기 쉬운 사실을 떠올려야 할지 모르겠다. 소설 <분노의 포도>는 1939년에 출간돼 43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였고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런데 영화 <분노의 포도>는 소설이 출간된 바로 그해 10월 4일부터 11월 15일까지 촬영되었고 이듬해 1월 24일에 개봉되었다. 믿기 힘들만큼 급박한 일정이다. 이것은 <분노의 포도>라는 영화가 제작자 대릴 자눅의 기민한 상업적 기획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앞서 말했듯 자눅은 라스트 신의 연출자였고 최종 편집자이기도 했다.

<분노의 포도>에 대한 존 포드의 태도는 자료들마다 조금씩 다르다. 예컨대 1955년에 가진 조지 블루스톤과의 인터뷰에서 포드는 이 영화가 “내 암흑기 시절의 작품”이라며 ‘젊은 시절의 일탈’처럼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인터뷰들에는 정반대의 발언이 담겨 있다. 1973년, 월터 와그너와 가진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는 “<분노의 포도>는 자눅이 시켜서 만들었지만 농촌에서 가난하게 자란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고 즐겁게 촬영했다”고 회고했다. 라스트 신도 자신이 자눅에게 연출을 권한 것이었다고 전했다.(「John Ford : Interviews」, ed. by Gerald Peary)

물론 우리는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지 판단할 수 없다. 실은 그건 중요하지도 않다. 그는 인터뷰에서 종종 본심과 반대로 말했으며, 설사 본심을 말했다 해도,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창작가의 발언과는 무관하게 그의 작품을 즐기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그가 억지로 만들었으며 실패작이라고 간주하는 <데이 워 익스펜더블 They Were Expendable>(1945)은 재평가되어야 할 걸작이다.(이 영화는 별도로 다룰 예정이다)

제작 배경과 관련된 사실을 다소 길게 적은 것은 한 가지 가설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작업한 존 포드에게, 앞서 언급한 몇몇 예외적 영화들을 제외하면, 포드 적인 주제도 포드 적인 이야기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포드 적인 방식, 혹은 포드 적인 쇼트, 포드 적인 리듬이 있을 뿐이다. 더 과격하게 말한다면, 포드 적인 ‘영웅’도 없다. 다만 포드 적인 ‘캐릭터들’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주장이다. 태그 갤러거도 ‘Fordian Hero’를 주요 의제로 삼는다. 하지만 나는 당분간 이 가설을 유지할 생각이며 이 점은 나중에 다시 논할 예정이다.) <분노의 포도>라는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감동적인 연설이나 분노의 격정이 아니라, 포드의 방식이다.

<분노의 포도>는 아름답다. 이 영화에서 존 포드와 처음 작업한 그렉 톨랜드(존 포드와는 <분노의 포도>와 <롱 보이지 홈 The Long Voyage Home>(1940)을 찍었으며 이듬해 오슨 웰즈의 <시민 케인>을 찍었다)의 촬영은 다큐멘터리적 사실주의와 불길한 악몽의 톤을 부드럽게 넘나들고, 대화만으로 이루어진 롱 테이크의 투 쇼트와 전통적인 쇼트-리버스 쇼트가 교차하며 우아한 리듬을 빚어낸다. 물론 여기에서도 <젊은 날의 링컨>에서처럼 헨리 폰다라는 특별한 배우의 육체와 음성이 그 속도와 리듬을 유연하게 조절한다.

헨리 폰다

많은 평자들은 존 포드를 시인이라고 부르고, <분노의 포도>를 시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이 시적인 것인가. 서정적 풍경, 혹은 시적인 대사인가. 하지만 그건 소재 혹은 촬영감독의 기예, 혹은 시나리오에 속한 자질이다. 그것만이라면 영화의 계관시인이라는 칭호는 옹색해질 것이다. 존 포드 영화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시적 감흥은 특정한 쇼트의 내부 요소들에만 국한되지 않은, 미장센과 움직임 그리고 그들의 배열 전체가 빚어내는 모종의 운율 혹은 오케스트레이션의 효과다. 그 효과는 분석의 언어가 직접 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

앞에서 톰 조드의 ‘I’ll be there speech’의 비약에 대해서 말했다. 원작소설에서는 이 대사가 비약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의 구어체가 지닌, 현실의 구어와는 다른 특별한 문어적 화법에 우리가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의 각성 과정이 장편소설의 긴 시간과 갖가지 사건들의 경험을 통해 제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에선 그 사건들의 극히 일부만 묘사되므로 톰 조드의 마지막 대사는 분명히 부자연스런 비약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비약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비약이 단순히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모종의 운율을 빚어내 우리를 이성적으로뿐만 아니라 감각적으로 설득한다는 것이다. 나는 앞서 이것이 존 포드의 방식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수정하려 한다. 이것은 존 포드의 또 다른 방식이다.

그 대사의 내용이 아니라 그 비약을 성립시키는 존 포드의 방식이 경이롭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 존 포드의 위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것일 뿐이다. <분노의 포도>를 둘러보는 우리의 여정은 이 비약에 관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그리고 간략한 해명에만 한정될 것이다.

초반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 1


# 2


# 3
 
우발적 살인으로 4년간 복역하고 가석방된 톰 조드는 전직 목사 케이시와 함께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존 삼촌 집에 찾아온다. 그는 애타게 가족을 찾아 헤맸으므로 톰과 가족의 조우는 격정적일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한다. 그런데 사태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가족들은 지금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1). 식사를 차린 어머니는 문득 창밖을 쳐다보니 톰과 케이시가 등을 보인 채 서 있다(#2). 톰은 무심한 동네 청년과 같은 자세로 케이시에게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다.

이 장면은 정말 이상하다. 톰은 왜 바로 창을 통해 가족이 보일 수 있는 위치에 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등을 돌린 채 문밖에서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왜 어머니가 부르자 그제서야 부드럽게 웃으며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일까(#3). 영화의 서사 내에는 단서가 없으며. 소설에는 이 이상한 순간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 은밀한 공백 하나가 기입된다. 그것이 사건의 공백인지. 캐릭터에 관한 정보의 공백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사건의 흐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지만 우리의 지각에 미세한 지각의 공백이라는 잔상을 남겨둔다. 아무것도 아닌 이 사소한 순간에 존 포드의 운율의 비밀이 담겨있다고 나는 느낀다.

유사한 계열의 쇼트가 영화 초반부에 등장한다. 막 출옥한 톰은 차주의 지시를 어기면서 자신을 태워준 고마운 트럭 운전수에게 갑자기 공격적인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차를 내리면서 “내 죄목이 정말 궁금하겠지? 살인이야”라고 사납게 쏘아붙인다(#4). 우리는 톰이 왜 갑자기 악의적으로 변하는지 알 수 없다. 이 대목은 소설에 상세하게 나온다. 트럭운전수가 심문하는 듯한 말투의 온갖 질문들을 계속 던지자 톰은 더 참지 못하고 화를 낸다. 하지만 영화에서 트럭운전수의 말과 태도에는 적의를 품을만한 점이 없다. 이 장면 역시 모종의 공백을 만들어내는데, 이번엔 분명히 캐릭터에 관한 정보의 공백으로 남는다.

# 4

전자는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장면, 후자는 소설의 장면을 축약한 장면이다. 양자의 공통점은 정보의 공백을 만들어 온전한 감정이입을 방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공백들은 정보들과 동시에 축적되어가며 모종의 운율을 만들어낸다. 온전히 형식적인 것도 그렇다고 내용에만 귀속되지도 않는 이 운율의 구현자는 배우 헨리 폰다의 육체와 음성이다. 이 배우의 연기는 불가사의하다. 그의 조용한 몸짓과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사건에 연루되지 않으려는 듯한 망설임 혹은 사건에 연루될 수 없는 초연함이, 사건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담담함과 분간할 수 없이 혼재되어 있다.(<젊은 날의 링컨>과 <분노의 포도>, 언젠가 다루게 될 <도망자>에서 헨리 폰다의 연기는 영화사에 남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들에서 폰다는 그의 육체와 음성만으로 시네마틱한 순간에 이른다.)

<분노의 포도>에서 헨리 폰다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사건을 넘어서는 과도함이다. 이 과도함은 격정이 아니라 일종의 제스처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사건에 온전히 종속되지 않는 초연함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봐야 한다. 트럭운전수에게 화를 낼 때, 그는 정말 화가 난 게 아니라 화를 내야 하는 운명의 과묵한 수행자처럼 보이는 것이다. 같은 의미로 삼촌의 집 앞에서 서성일 때, 그는 자신에게 닥쳐올 무거운 운명의 예감 앞에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의 몸짓과 음성에는 사건과 정보로 환원되지 않는 빗금의 영역, 공백의 영역이 있다. 헨리 폰다라는 육체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공백이다.

이 정도의 설명만으로 ‘I’ll be there speech’의 비약이 성립되는 이유가 납득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사건의 공백, 정보의 공백, 그리고 헨리 폰다라는 육체의 공백이 이루는 전조의 계열이 없었다면, 마지막 순간의 비약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I’ll be there speech’는 깨달은 자의 격정적 간증이 아니라, 가혹한 운명의 담담한 수락 연설이다. 나는 이 연설을 헨리 폰다 아닌 어떤 다른 배우가 말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포드 적인 공백의 쇼트들, 헨리 폰다라는 특별한 자질의 육체가 마지막 순간의 비약을 기적적으로 성립시킨다.

(대릴 자눅이 연출한 마지막 장면은 ‘I’ll be there speech’의 비약 이후에 덧붙여져 있다. 톰 조드가 떠나고 남은 가족들이 좋은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자눅이 수고했지만 내 생각에 이 마지막 장면은 완전히 불필요한 사족이다.)

‘영예의 시기’의 네 영화(<젊은 날의 링컨> <역마차>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분노의 포도>)를 말하면서, 각 영화의 서사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존 포드가 뛰어난 스토리텔러라는 세간의 평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의 위대성은 다른 데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존 포드의 영화는 읽는 영화가 아니라 보는 영화다. 이 단순한 명제를 실행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존 포드의 영화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 시기의 영화에 대해 썼다. 다음 여정을 아직 정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을 갖고 생각하며 정하려 한다. 좋은 여름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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