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재에서 존 포드의 1930년대 작품 중에는 1939년의 신화적인 두 영화 <
역마차>(글)와 <
젊은 날의 링컨>(글)을 제외하면, <
굽이도는 증기선>(글)(1935) 밖에 다루지 않았다. 이것이 존 포드의 세계가 1930년대 말에야 원숙해졌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인상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위의 세 편만 만들었다 해도 존 포드는 영화사의 만신전에 등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1930년대의 포드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빛나는 순간을, 압도적인 걸작들에 가려진 영화들 곳곳에 새겨놓았다. 그중에서도 <
순례여행>(1933)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들이 전사한 어머니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
순례여행>은 무성영화 <
네 아들>(글)(1928)을 곧바로 연상시킨다. 캐릭터의 면에서라면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 독일 시골 마을이 무대인 <네 아들>의 어머니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이고 순박한 전통적인 어머니이다. 반면 미국 시골 마을이 무대인 <순례여행>의 어머니는 거의 정반대로 권위적이고 배타적이며 이기적이다.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외아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더 많은 땅을 가지길 원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들에선 찾아보기 힘든 이 비정한 가모장은 아들의 아이를 가진 연인과 떼놓기 위해 아들의 입대서류를 제출한다. 아들이 프랑스에서 전사한 뒤에도 아들의 아이를 손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10년이 지난 뒤, 프랑스 전장에서 아들을 잃은 미국 어머니들의 프랑스 순례여행에 마지못해 참여하면서 그녀는 비로소 바뀐다.
<
순례여행>은 곡예의 드라마처럼 보인다. 이 드라마엔 두 가지 난제가 있다. 어머니 한나 제솝(헨리에타 크로스맨)은 포드의 주인공들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에 속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에서 이만큼 부정적인 중심 캐릭터는 <
아파치 요새>(글)의 써스데이 중령(헨리 폰다) 정도지만, 그의 곁엔 요크 대위(존 웨인)라는 포드적 영웅이 있었다. 한나는 <순례여행>의 유일한 중심인물이다. 용납하기 힘들 정도로 이 부정적인 주인공의 긍정적 변화를 서사적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
또 다른 난제는 희극의 도입이다. <
순례여행>은 기본적으로 스산한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희극의 표정이 있고 유머러스한 사건이 있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아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죽음을 맞게 한 어머니의 이야기에 어떻게 조금이나마 희극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아들을 죽게 만든 어머니가 참회 이전에도 유쾌하게 웃는 장면을 관객이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심지어 함께 웃도록 만드는 게 가능할까.
포드의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다. 두 난제를 단 몇 쇼트의 배치와 간단한 대사만으로 해결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드라마적 곡예라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만큼 경묘한 솜씨다. 미학적 전위성을 앞세운 나머지 이야기꾼으로서의 포드의 장인적 능력을 경시해선 안 될 것이다. 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작가이고, 그의 작가로서의 위대성은 스튜디오 시스템이 요구하는 서사경제를 경유해 발현되었다. <
순례여행>은 포드가 이미 1930년대 초반에 어떤 이야기라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걸출한 장인이 되었음을 증언한다.
물론 포드가 훌륭한 이야기꾼이라는 말이 그가 좋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이야기 자체의 자질은 시나리오작가의 능력에 속하며, 1930년대부터 <
웨건 마스터>(글) 외에 그가 직접 각본을 쓴 영화는 없다. 세 편의 포드 영화에서 각본을 쓴 누널리 존슨은 포드가 “자신의 생각을 종이에 써서 전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대신 포드는 시나리오를 끊임없이 고치면서 특히 “대사에 대한 눈부신 감각”을 발휘했다. 포드와 13편의 영화를 함께 한 시나리오작가 프랭크 뉴전트는 그래서 완성된 영화는 “언제나 포드의 것이었고, 시나리오작가의 것이라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
순례여행>은 이야기꾼으로서의 포드의 능력이 위대한 단순성이라는 부를만한 특유의 간결한 터치에 있음을 입증한다. 이 터치의 중심에 한나 제솝이라는 여인, 혹은 그 여인을 연기한 헨리에타 크로스맨의 얼굴이 있다. 이 영화 외엔 영화사가 기억할만한 작품을 남기지 않는 이 배우의 시선과 표정의 쇼트에 포드는 분노와 집착, 불안과 연민, 망설임과 혼란의 긴 이야기를 새겨 넣는다. 태그 갤러거의 표현을 빌리면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은 이 여인의 눈 속이다. 포드는 영화적 풍경의 발명가이지만 배우 연출의 대가이기도 했다. “영화의 비밀은 배우의 눈을 찍는 것”이라는 인상적인 말도 포드의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순례여행>은 여인의 표정과 시선의 영화다.

#1

#2

#3

#4
<
순례여행>은 한나의 표정과 시선에서 시작된다. 들판에서 일하는 아들(#1)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2)은 만족스러운 것 같다. 아들과 농장이 그녀의 소유다. 세상과 동떨어진 듯한 이 땅에서 한나는 제왕이다. 아들과 땅의 소유자인 그녀는 동시에 시선의 권력자이다. 그녀는 적어도 여기선 다 볼 수 있다. 농장이 원경으로 보일 때도 지평선은 보이지 않거나 화면의 상단에 드러난다. 게다가 이 농장은 <
선라이즈>의 마을을 연상시키듯 안개와 옅은 어둠에 갇혀 있다. 이곳은 한나의 시선이 편재하는 그녀의 폐쇄된 왕국이다. 그러나 그 소유와 시선의 권력은 처음부터 금이 가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들은 울타리를 넘어간다. 그는 연인 마리에게 달려가는 중이다(#3). 한나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소유물인 아들을 앗아갈 대상인 여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권력의 위기를, 전 장면과는 다른 불안한 표정의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4).

#5

#6

#7

#8
아들 제임스가 연인을 만나는 장면은 아름답다. 제임스는 무언가를 보면서 환한 얼굴로 연못에 돌을 던진다(#5, #6). 연못의 물이 파문으로 너울거리다 파문이 가라앉으면서 마리의 얼굴 윤곽이 수면에 드러나고 카메라는 틸트업으로 마리의 얼굴이 비춘다(#7). 연못을 사이에 둔 수줍은 두 연인의 애틋한 유희. 그런데 더없이 아름답게 촬영된 이 유희에는 어딘지 모를 불안과 비애가 있다. 연못이라는 작은 격리, 장난이자 신호이지만 수면에 비친 연인의 이미지의 훼손을 경유해서 비로소 마리가 등장할 때 마리의 얼굴은 놀랍게도 기쁨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다(#8). 마치 앞으로의 서사에서 펼쳐질 격리와 훼손을 이미 예감하고 있다는 듯.

#9

#10
마리의 클로즈업은 이 영화의 가장 훌륭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이 장면과 비교하기 위해 어머니와 아들이 마주 보고 대화할 때의 숏-리버스 숏을 떠올려 보자. 어머니의 클로즈업과 아들의 클로즈업은 얼굴의 크기가 다르다(#9, #10). 한나의 강조된 클로즈업에는 프레임을 지배하는 모종의 표정이 있다. 하지만 제임스의 평범한 클로즈업에는 단순한 리액션의 표정만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사람의 권력관계를 뜻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서사 내에서의 둘의 다른 지위를 반영한다. 이 영화는 아들 제임스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11

#12
마리의 클로즈업(#8)이 인상적인 것은 그 크기와 표정의 강도에서 연인인 제임스의 쇼트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마리가 제임스를 바라볼 때, 그녀는 연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랑을 가로막고 결국 파국으로 몰고 갈 어머니를 동시에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리의 클로즈업은 제임스의 클로즈업의 리버스숏이 아니라, 이 프레임에 존재하지 않는 한나의 클로즈업(#4)의 리버스숏이다.
한나의 시선의 편재성이, 그 권력의 강력함과 비정함이, 그리고 자신들의 비극적 운명까지 이 기묘한 클로즈업에 담겨 있다. 포드는 불과 4분 만에 이 모든 상황과 예감을 단 몇 개의 숏만으로 압축한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인의 현실적 대면은 조금 뒤에 이루어진다. 한나는 마리를 찾아와 아들을 떠나라고 강요한다. 이 장면의 숏-리버스숏에서의 두 인물은 정확히 같은 크기와 강도로 담겨있다(#11, #12). <
순례여행>은 두 여인의 이야기인 것이다.

#13

#14
제임스가 프랑스 전장으로 떠나는 기차역에서의 가련한 두 남녀의 마지막 조우 장면(#13)도,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한나는 보고 있었다. 이 장면과 대조를 이루는 기차역 장면이 얼마 뒤에 등장한다. 제임스가 전장에서 생매장당해 죽은 지 10년이 지난 뒤, 한나는 프랑스로 가기 위해 기차에 오른다. 멀찍이 있던 마리와 아들 지미는 기차로 다가와 창가에 앉은 한나에게 자신과 아들을 위해 제임스의 묘지에 놓아달라며 꽃송이를 내민다(#14). 두 장면을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모두 최종 목적지가 프랑스이며 주요 인물이 모두 등장하지만, 전자의 제임스는 후자의 꽃으로 대체되었고, 마리의 배 속에 있던 태아는 이제 열 살의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전자의 장면에서 보이지 않았으나 시선으로 존재했던 한나는, 제임스 대신 기차를 타고 있다.
이 영화에서 단 한 장면을 꼽으라면 바로 이 숏(#14)이다. 이 장면의 요점은 꽃을 받아드는 한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전 장면에서 한나는 땅을 20에이커나 더 샀다. 그녀의 왕국은 더욱 커졌고, 그 강대한 왕국에 마리와 아이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 미혼모의 자식이라고 놀림받는 아이는 한나를 할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고 제임스의 개에게 접근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한나는 마리의 꽃을 받았고, 포드는 그녀의 얼굴을 찍지 않았다.
이 카메라의 시선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나가 자신의 얼굴을 숨긴 것인가. 아니면 카메라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찍은 것인가. 달리 말하면, 인물이 보지 않는 것인가, 카메라가 보지 않는 것인가. 물리적으로는 후자가 맞지만, 심리적으로는 전자가 맞다. 우리는 사실상 양자를 식별할 수 없다. 포드는 인물을 볼 수 없는 지점에 카메라를 두는 것으로 그 인물을 진정으로 드러낸다. 극 중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객관적 시점의 카메라가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보는 것이 불가능한 자리를 선택함으로써 인물의 태도와 심리를 표현하는 것, 아니 그 인물의 고통을 존중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표현해도 다 드러낼 수 없는 인물의 감정을 카메라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포드가 감정의 미스터리를 찍는 방식이다. 이런 장면 앞에서 카메라의 시점에 관한 복잡한 기호학적 논의는 사실상 거의 무용하다. 나는 이런 카메라를 경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과 40여 분이 지났을 뿐이지만 여기서 영화가 끝났고 이후는 여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한나는 자신의 죄의식과 고통을 감춘 채 순례여행을 떠날 것이고, 결국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이 미스터리의 감정 숏에는 영화 전체에 값하는 긴 이야기가 담겨있고 그 이후에는 웃음이든, 참회의 눈물이든 허용되지 못할 것이 없다. 그 모든 예감이 이 신비로운 숏 안에 모두 담겨 있다. 이것이 앞서 말한 두 가지 난제의 해결하는 포드의 방식이다.

#15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이후의 프랑스 장면들은 전반부와 대조적이다. 한나의 농장을 감싸던 폐쇄적 안개는 사라지고, 개방된 세상 앞에서 이제 한나는 제왕이 아니라 낯선 순례자가 된다. 자신의 왕국을 노려보던 한나의 시선은 이제 감시의 시선이 아니라 방황과 발견의 시선으로 바뀐다.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아들과 같은 고뇌에 빠진 청년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이기적 어머니를 만나고, 자신의 왕국에는 없던 축제를 발견한다. 이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와, 감췄던 자신의 표정을 마리와 아이에게 보여줄 일만 남았다. 아들의 아이와 사실상 처음으로 마주 볼 때(#15), 순례는 끝난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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