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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바코 로드>(1941)는 당대에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실패했으며 오늘에도 존 포드의 영화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영화에 속할 것이다. 앤드루 새리스의 표현을 옮기면 이 영화는 “1940년과 1941년에 거둔 존 포드의 엄청난 성공행렬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시 사람들은 최고의 위치에 오른 포드가 왜 이런 프로젝트에 손댔는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포드의 열렬한 찬미자인 태그 갤러거의 두꺼운 저서도 이 영화에는 단 세 문장만 할애한다. “시나리오를 쓴 누널리 존슨은 <
타바코 로드>가 엉성하고 서투른 구식 코미디에 의존함으로써 대실패작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몇몇 마술적 순간들이 등장하지만.... <
굽이도는 증기선>에서 하층민을 바라보는 포드의 단순명료한 시선이 여기선 들뜬 포퓰리즘의 과장된 제스처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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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바코 로드>의 원작은 브로드웨이에서 1933년부터 1941년까지 최장기 공연기록을 세우며 대성공을 거둔 연극이다. 어스킨 콜드웰Erskine Caldwell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잭 커크랜드Jack Kirkland가 희곡을 썼다. 앤드루 새리스는 이 영화의 실패 이유가 당시 할리우드 제작준칙(hollywood production code)이 콜드웰의 재기 넘치는 음란함과 커크랜드의 화장실 유머를 용인하지 않는 바람에 존 포드와 누널리 존슨이 원작의 많은 부분을 버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 판단도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이 영화의 제작 경위에 대해선 전해지는 바가 거의 없어 당시 포드의 의중을 알긴 힘들지만, 적어도 포드가 그의 영화 전체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든 음란함과 화장실 유머 때문에 원작에 이끌리진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이 영화의 지지자는 두 사람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2014년 서울과 부산에서 존 포드 회고전이 열릴 무렵 간행된 「씨네21」에 보내온 자신의 존 포드 10베스트 명단에 <
타바코 로드>를 포함시켰다. 이 명단에는 포드 전문가들도 잘 거론하지 않는 무성영화 <버킹 브로드웨이>(1917) <켄터키 프라이드>(1925)도 들어있다. 그리고 하스미다운 코멘트가 덧붙여져 있다. “<
철마>(1924) 혹은 <
3인의 악인>(1926)에서 시작해 <
수색자>(1956)으로 끝나는, 그리고 <
밀고자>(1936) <
역마차>(1939) <
젊은 날의 링컨>(1939) 등이 포함되는 포드의 10베스트 리스트를 작성하는 일은 우리에게 쉬운 일이다. 하지만 도쿄의 유난히 더운 날씨 때문에 내 마음은 포드의 덜 알려진 영화들로 향한다. 물론 추운 날에는 이 명단이 완전히 달라지겠지만...”
다른 한 사람은 영국의 포드 열광자인 린지 앤더슨이다. 그는 “관점의 일관성을 고수하면서도 무드와 악센트를 교차시키는 포드의 재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
타바코 로드>를 제시한다. 앤더슨은 이 영화를 “회한에 찬 애상과 격렬한 슬랩스틱, 냉혹한 풍자와 부드러운 감상성을 오가며 무드를 끝없이 변주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특출한 솜씨”를 보여주는 포드의 최고작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내로라하는 포드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만큼 극단적으로 견해가 갈리는 영화는 <타바코 로드> 외엔 찾기 힘들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노부부인 지터 레스터와 에이다 레스터는 목화농업으로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황폐화한 타바코 로드에 살고 있다. 17명 정도의 자식을 두었지만(그들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이젠 모자라고 착한 딸 엘리 메이와 역시 모자라지만 거의 미친 아들 듀드, 그리고 유령처럼 주위를 서성이다 불현듯 사라지는 노모가 가족의 전부이며, 끼니를 잇기 힘들만큼 가난하다. 자신들도 모르게 그들의 땅이 은행에 차압당하고, 며칠 안에 농지 임대료를 내지 않으면 3대째 살아온 타바코 로드를 떠나야 할 처지다. 위기의 지터 노인은 엉성한 작전을 벌인다.
사적인 소감을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2005년쯤 이 영화를 뒤늦게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정상이 아니어서 마음이 가는 인물은 하나도 없는 데다, 특히 소란스럽고 경박한 아들 듀드는 때리고 싶을 만큼 짜증 나고 거슬렸다.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는 사실상 없으며, 상태가 많이 안 좋은 인물들이 벌이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헛소동과 실소가 새 나오는 촌스런 유머와 슬랩스틱이 영화의 거의 전부였다. 난센스 코미디를 넘어선, 요즘의 은어로 ‘병맛’ 코미디였다. ‘이건 위대한 존 포드의 영화일 수가 없다.’ 황당무계한 영화 리스트라는 게 있다면 당장 최상위에 올리고 싶었다.
이상한 일은 그럼에도 이 영화가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기엔 즉각 해명하기 힘든 과격하고 대담한 몸짓이 관류하고 있다는 느낌, 포드의 어떤 영화에서보다 사적이고 무모한 그 몸짓이 모종의 해방감을 빚어낸다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다. 그 느낌은 이 영화보다 1년 전에 만들어져 모두에게 절찬 받은 <
분노의 포도>를 다시 본 뒤에 더욱 강해졌다. 만일 누군가 <분노의 포도>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면 <
타바코 로드>를 당분간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하지만 <분노의 포도>에서 뭔가 답답함을 느낀 사람이라면 <타바코 로드>를 보고 나와 비슷한 느낌을 공유하게 될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 사적인 느낌의 몇 자락을 말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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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를 다시 떠올려보자. 이 영화는 포드의 필모그래피에서 유례없이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며 메시지의 노골적 언명이라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여기서 하층민인 톰 조드 일가는 나쁜 세상에 의해 상처 입고 수탈당해 떠도는 순결하고 가련한 존재들로 그려진다. 우리는 이 시선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같은 의미에서 이 시선이 규범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현실에서의 견해가 아니라 작품 안에서라면 특별히 칭송할 것도 문제 삼을 것도 없는 이 규범적 시선이 존 포드의 다른 영화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은 우리가 봐온 바와 같다.
존 포드의 영화는 대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스테핀 페칫이 연기하는 흑인은 충직하지만 멍청하며, 인디언은 강직한 전사와 잔혹한 살육자를 수시로 오간다. 여성들은 <일곱 여인> 등 소수를 제외하면 대체로 수동적이며, 하층민들은 대체로 선량하지만 소란스럽고 잘 속는다. 포드의 탈규범적인 성향은, 그의 정치적 보수성을 비판하는 진보적 비평가들에 의해 종종 경시되지만, 그의 작품이 지닌 특별한 활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피터 보그다노비치와의 인터뷰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포드는 지금 세대처럼 정치적 올바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전력투구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거침없다는 포드의 각인이 새겨졌다”고 말할 때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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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는 공백과 비약의 수사학(<분노의 포도> 편 참조)에도 불구하고 <
러틀리지 상사> <
샤이엔의 가을> 등과 함께 포드의 드문 규범적인 영화에 속한다. <
굽이도는 증기선>(1936)이 하층민의 악덕과 무지 그리고 미덕과 용기가 난장을 벌이는 축제의 영화라면, <분노의 포도>는 무고한 하층민의 고난과 시련이 점화한 분노의 영화이며 정의의 영화다. 두 영화 사이에 놓인 1939년의 ‘젊은 링컨’은 난장의 도취에서 정의의 소명으로 망설이며 느리게 이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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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바코 로드>의 놀라운 점은 중년의 포드를 성공으로 인도한 이 궤도를 완전히 부숴버리고 스스로 탈선한 열차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지저분하고 가난한 주요인물 모두가 동정할 여지도 없는 금치산자에 가까우며, 서사는 비루한 소동들의 연쇄일 뿐이다. 얼핏 보기에 포드는 <
분노의 포도>에서와는 정반대로 이 가련한 하층민들을 조롱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터 노인은 가족과 합세해 아내(지터의 막내딸)가 도망갔다며 징징거리는 사위 러브(놀랍게도 워드 본드가 연기한다)를 구타해 그가 갖고 있는 무를 빼앗아 먹으며, 도망간 막내딸 대신 언니를 그에게 반강제로 보낸다. 지터는 어렵사리 구해온 옥수수를 먹느라 아이들 몰래 삶아 먹느라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와 집을 떠났다가 얼떨결에 돌아온 지터가 “어제부터 할머니(그의 어머니를 지칭하는 듯)가 안 보이네. 저기 숲으로 가서 죽었나 보군”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기가 막힌다.
물론 등장인물의 슬픔에 카메라가 깊이 동조하는 ‘마술적 순간’들이 간혹 등장하지만, 이 장면들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왜소해 아무리 봐도 애상과 풍자, 슬랩스틱과 감상이 균형을 맞추었다는 린지 앤더슨의 주장은 납득하기 힘들다. 그런 표현은 <
굽이도는 증기선>과 <
젊은 날의 링컨>에나 어울릴 것이다. 무엇보다 포드는 이 영화를 하나의 이야기로 성립시키길 거부하려는 것처럼 결말조차 터무니없어 보이도록 만들었다. 모든 소동이 엉겁결에 정리되었을 때, 그가 얻은 건 10달러밖에 없다. 7년 동안 멈춘 목화 농사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필요했을 두 아이는 그사이에 떠났다. 그는 이미 농사지을 힘이 남아있지 않아 보일 만큼 늙어버렸다. 그런데도 이 추레하고 왜소한 노인은 어이없게도 “올해가 내 인생 최고의 해가 될 거야”라고 말한다.
모든 면에서 <
타바코 로드>는 <
분노의 포도>를 뒤집어버린다. 마치 <분노의 포도>가 자기 영화가 아님을 강변하려는 듯, 같은 사회적 처지의 주인공을 내세워 놓고 인물도 사건도 모두 저열화하며, 진지한 감정과 의미 있는 행동의 가능성을 봉쇄한다. 간혹 이질적인 것들을 뒤섞되 균형과 조화를 파기한다. 자기 반동 혹은 자기 파괴의 시도처럼 보이는 포드의 이런 선택의 동기를 짐작하기는 힘들다. 다만 <타바코 로드>를 보고 나면 포드를 불균형의 충동, 불협화음의 욕망을 억누를 수 없는 작가로 다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뿐이라면 <
타바코 로드>는 ‘흥미로운 실패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난감함 속에서도 내가 매혹된 건 이 영화의 어떤 몸짓과 운동의 형상들이다. 난센스로 가득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일관된 방향의 운동이 있다면 그것은 부서짐의 운동이고 유일하게 일관된 행위가 있다면 사물을 부수는 행위이다. 첫 장면에서부터 그러하다.
모자란 듀드는 차를 사자마자 나무를 들이받고 덮개를 미친 듯 뜯어내며 차를 부수고 싶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손봐주겠다며 전조등을 만지던 지터는 차를 더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결과 하루 만에 고급승용차는 초라한 고물이 되어버린다. 차를 몰래 팔아 100달러를 마련하려는 지터의 시도 외엔, 이 고급승용차를 대하는 등장인물들의 모든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백미가 등장한다. 운전을 방해했다고 듀드가 러브에게 시비를 걸자, 칭얼거리던 러브는 이제야 워드 본드답게 말없이 듀드를 때려눕힌 뒤 길가에 처박힌 차를 뒤집어 박살 내버린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모든 헛소동의 심장이다. 붕괴 직전의 이 공간에 고급승용차가 소속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라는 <
타바코 로드>의 진정한 관심사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그것도 함께 부서져야 한다. 이 이질적 사물이 빨리 타바코 로드 자신의 형상처럼 무너져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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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바코 로드>는 표면의 서사와는 무관하게 부서짐의 운동이며 붕괴의 유희다. 지터의 마지막 대사는 붕괴운동의 완료를 위장하며 동시에 암시하는 말이다. 사태가 호전될, 다시 말해 붕괴가 멈추고 재건이 개시될 어떤 전망도 없을 때, 가장 좋은 일은 죽음이다. 지터도 할머니처럼 사라져 죽어갈 것이며 이것이 타바코 로드의 형상이 이를 종착지일 것이다. 이것이 훌륭한가, 라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힘들다. 다만, 서사의 표면적 흐름과는 정반대의 운동과 형상이 전개되는 기괴한 영화를 달리 본 적이 없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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