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샤인(moonshine)은 밀주를 뜻하는 금주령 시대의 용어다. 깊은 밤, 달빛 아래 빚어지거나 운반되는 디오니소스의 금지된 선물. 밀주제조자(moonshiner) 스스로 만들었을 법한 이 낭만적인 단어는, 달빛-술-도취-금지-위반의 이미지와 의미의 연쇄를 빚어내 그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를 담은 감상적 풍경화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저 사소한 소재로 등장할 뿐인 이 단어가 이 영화의 또 다른 제목처럼 느껴진다.
<
수색자>(1956)를 만든 다음, 존 포드는 아버지의 고향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 동료들과 영화사(Four Provinces Production)를 세웠고, 그곳에서 만든 첫 영화가 <
라이징 오브 더 문>이다. 세 가지 에피소드를 묶은 이 영화의 제목은 19세기부터 불리던 아일랜드 혁명가 제목이기도 하며, 세 번째 에피소드의 바탕이 된 연극 제목이기도 하다. 막이 열리면 작고 오래된 성이 우두커니 서 있는 아일랜드의 시골 풍경이 펼쳐지고(#1),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에 실린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1
말해 주오, 션 오파렐
어디서 우리 모일지를,
강가 그 오래된 곳에서.
당신과 내가 잘 아는 그곳에서,
어깨 위에 창을 매고,
달이 뜰 무렵(at the rising of the moon).
이것은 반란의 노래다. 그렇게 모인 이들은 달빛 아래 피의 투쟁을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더없이 감미로운 멜로디와 목소리, 감상적 정조로 가득한 풍경은 보는 이의 넋을 잃게 만들 만큼 아름답다. 반란 그리고 도취, 혹은 반란으로서의 도취, 혹은 도취로서의 반란. <
라이징 오브 더 문>은 아마도 그런 것에 관한 영화일 것이다.
우리의 도취를 중단시키고 1956년 당시의 현대화된 더블린 중심가로 옮겨온 카메라는 이어 영화의 소개를 맡은 아일랜드계 배우 타이론 파워를 비춘다. 그는 아일랜드인들이 모여 진정한 아일랜드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며, 첫 에피소드를 이렇게 소개한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영화이면서 모든 것에 관한 영화입니다.”
첫 에피소드의 제목은 ‘법의 위엄’(Majesty of Law)이다. 중년의 형사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경찰서를 나와 걷는다. 고즈넉한 들판, 낡은 성벽과 작은 강을 지나 그가 찾아가는 곳은 고집쟁이 노인 오플래허티의 허름한 시골집이다. 그곳에서 형사와 노인, 그리고 주책맞고 수다스런 밀주제조자 이웃은 위스키 제조법, 민간요법, 노래들, 오래된 비밀들... 이제는 사라졌거나 금지된 것들에 관한 수다를 나눈다. “술에도 예술에도 비밀이 있다네. 순수하고 달콤한 축복이...” 수다 끝에 형사의 용건이 튀어나온다. 노인은 자신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른 이웃 피니를 때려 부상을 입혔고 고소당했다. 벌금 5파운드를 내지 않으면 노인은 감옥에 가야 한다. 노인은 거실 바닥에 보관한 돈을 꺼내 들고 말한다. “난 돈이 있지만 절대 내지 않을 거네.” 그리고 주저하는 형사에게 금요일 저녁 식사를 끝내고 경찰서에 가겠다고 말한다.
금요일 저녁, 집을 나서는 노인에게 머리에 붕대를 두른 피니가 자가용을 타고 찾아와 5파운드를 내밀며 그 돈으로 벌금을 내라고 윽박지르듯 애원한다. 노인은 돈을 내팽개치며 말한다. “이 간사한 인간, 내가 널 벌할 거야. 나는 너 때문에 맨바닥에 눕게 될 거야. 나는 너 때문에 고통받을 거야. 그래서 너와 너의 아이들, 그리고 너의 아이들의 아이들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될 거야! 저 돌들이 무너지지 않는 한... 누가 나와 함께 저 언덕 위에 오르겠나?” 노인은 집을 어루만지고 자갈에 입을 맞춘 뒤 길을 떠난다. 그를 지켜보던 농부들은 고개를 숙인다. 법의 위엄? 이건 유머다. 이 제목은 제멋대로 법을 희롱하며 ‘법 나으리, 죽을죄를 지었나이다’라고 능청스럽게 조아리는 광대의 어조로 읽어야 한다. 거구의 범죄자가 왜소한 형사를 위로하듯 감방으로 향하는 마지막 장면(#2)은 그 유머의 다른 표현이다. 진정한 위엄의 소유자는 바로 이 불법의 노인이다.

#2
이 에피소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다. 그저 한 노인이 이웃을 때린 뒤 벌금 내기를 거부하고 징역형을 자처했다는 게 전부다. 이 사소한 세계에 사금파리와도 같은 말들과 노래와 표정과 몸짓과 풍경이 넘실댄다. 그것들은 밝지 않으며 가냘프게 반짝인다. 막 예순을 넘긴 존 포드는 이제 곧 사라질 애처로운 반딧불과도 같은 순간들을 아무것도 아닌 사건 주변에 무심한 손길로 넘치도록 담아낸다. ‘법의 위엄’은 이들을 추방해왔고 곧 소멸시킬 것이다.
태그 갤러거는 이 반동적인 노인이야말로 혁명가이며, 비루한 밀주제조자 또한 당당히 반란자라고 표현했다.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에피소드의 애상적 정조를 감안하면 다소 과도한 해석 같다. 노인의 선택은 이젠 사소한 반항으로밖에 드러낼 수 없는 잃어버린 영웅주의에 대한 애도에 가깝다. 법의 태양이 뜨면 이제 달빛 같은 영웅주의는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곧 사라질 달빛에의 도취다.
감상적이지만 거부하기 힘든 첫 에피소드의 정조에 마음이 젖는다면, 이제 다음 이야기를 편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야말로 최소한의 사건조차 없는 사소한 것들의 난장이기 때문이다. 막간에 타이론 파워가 다시 등장해 “이것은 거대한 모험일 수도 있다”고 너스레를 떤다. 제목은 ‘1분간 정차’(One Minute’s Wait). 기차가 작은 시골 역에 정차한다(#3). 말 그대로 이곳은 1분의 세계다. 그러나 그 1분은 끝나지 않을 듯 연장되고 반복된다.

#3
‘1분간 정차’라는 역무원의 말이 떨어지자 승객들은 물밀 듯 몰려나와, 맥주를 마시고 수다를 떨며 춤추고 노래한다(#4). 한쪽 구석에서는 혼담을 벌이고 연애가 시작된다. 시골 역은 순식간에 떠들썩한 시장판이 된다. 1분의 몇 배가 넘는 시간이 지나고 출발 신호가 떨어지면 승객들은 다시 승차하지만 곧 역무원은 다시 ‘1분간 정차’를 외친다. 이 과정은 몇 번이나 반복된다. ‘아일랜드에서 제일 큰’ 염소를 실어야 하고, 주교를 위한 바닷가재도 실어야 하며, 늦게 도착하는 하키팀을 위해 증차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다시 올 ‘1분’을 기다렸다는 듯 승객들은 순식간에 하차해 떠들고 놀다 서둘러 승차한다.

#4
우리는 이 기차의 목적지를 알 수 없으며 누구도 목적지를 말하지 않는다. ‘1분의 대기’로 명명된 그 시간, 그리고 그 시간에 펼쳐지는 사소한 세계가 이 영화의 전부다. 목적지를 잊어버린 1분의 휴식, 짧은 그러나 한없이 연장되고 반복될 듯한 신명과 도취의 세계. 이 세계는 동시에 부조리와 난센스의 난장이기도 하다. 잠겼던 문이 열쇠 없이 열리고, 1등칸의 표시는 임의적으로 옮겨 다니며, 승객들에게 유령 이야기를 늘어놓던 주정뱅이 기관사는 그 따위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돌변한다. 어른들이 지참금 거래로 자식들의 결혼에 합의하는 사이 그들의 자식들은 사랑에 빠져, 타산과 순정이 순식간에 합일한다. 무엇보다 이 길고 소란스런 1분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철도국 간부와 주교라는 권력자들이다. 이 세계는 세상의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가 뜻하지 않게 빚어낸 잉여의 시간, 반짝이는 무질서의 틈새와 같은 세계, 부조리와 난센스도 정화되는 유토피아의 순간이다.
물론 그 세계는 결국 끝에 이르고 기차는 출발해야 한다. 목적과 질서를 잊어버렸을 때 시작된 서사가 목적지를 기억해내자 기차는 움직이고 영화는 끝난다. 다시 출발하는 기차를 놓친 유일한 커플이 결혼식장이라는 목적지에 빨리 가야 한다고 서두르던 중년 부부다. 반복되는 ‘1분들’에 지쳐 차 한 잔 마시기 위해 결국 내렸으나 주문한 차는 오지 않고 기차는 떠난다. 이것은 존 포드가 자신의 인물에게 가한 유머러스한 징벌처럼 느껴진다. 이 인물의 죄는 목적지를 잊어야 할 세계에 와서 목적지에 집착한 죄이다.
첫 에피소드가 시대가 박탈해간 것들에의 도취라면, ‘1분간 정차’는 그 자체가 존 포드에게 평생 강요되던 할리우드의 목적론적 서사에 대한 반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에피소드야말로 후기 존 포드 영화의 심장과 같은 것은 아닐까. 전후의 많은 전쟁영화와 서부극에서 임박한 전투 직전에도 혹은 복수의 출정을 앞두고도 끝없이 이어질 듯한 노래와 춤의 시간을 마련하던 존 포드에게 ‘1분간 정차’의 전적인 잉여의 세계야말로 그가 진정 사랑한 세계가 아니었을까. 이것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볼 질문으로 남겨두고 마지막 에피소드로 넘어가 보자.
‘1921’이라는 제목이 붙은 세 번째 에피소드는 셋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다. 영국군에 체포된 아일랜드 혁명가 션 큐란은 사형을 1시간 앞두고 있다. 아일랜드 민중들이 사형집행장 옆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는 동안 반란군은 수녀로 가장한 행동대원 둘을 보내 션 큐란을 빼내는 데 성공한다. 션 큐란은 삼엄한 영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드디어 배에 오른다. ‘1921’은 반란의 서사, 그것도 정치적 반란의 서사다.
스토리가 너무도 명료한 이 에피소드에 대해선 별로 보탤 말이 없다. 존 포드는 특유의 능청스런 유머와 유려한 리듬으로 능란하게 사건을 묘사하고 우아하게 목적지에 도착한다. 다만 한 가지가 이상하다. 이 에피소드의 거의 모든 장면은 사각(斜角)으로 촬영되었다(#5). 불안과 불의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일까. 하지만 포드는 이처럼 과도하게 인위적인 카메라워크를 사용한 적이 없다. 사각촬영이 빈번히 등장한 필름누아르들 중에서도 이만큼 극단적인 앵글로 일관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나는 이 카메라워크가 최선의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그 선택을 수긍할 수 있다. 수평으로 돌아간 프레임 안에서 션 쿠란을 태운 배가 강물 위를 떠간다. 그리고 오프닝 시퀀스에서 우리의 귀를 홀렸던 혁명가 ‘The Rising of the Moon’이 다시 흘러나온다(#6).

#5

#6
이 장면은 아름답다. 어쩌면 지나치게 아름답다. 1921년 이후 그리고 이 영화가 개봉된 1957년 이후에도 독립을 위해 많은 피를 흘려야 했던 아일랜드인들의 고난을 감안하면 이 장면은 너무 감상적인 게 아닐까. 하지만 이런 일말의 우려는 존 포드의 동시대인도 아일랜드인도 아닌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이 마지막 장면에 취한다. 세계는 기울어져 있지만, 영웅을 실은 배는 달빛 아래 수평의 강물 위를 흘러간다. 아일랜드인에게라면 그의 행로는 기울어진 세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겠지만, 21세기의 외국 관객인 내게 션 큐란은, 존 포드의 많은 영웅들이 마지막에 그랬듯이, 이 세상을 떠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말해주오, 션 오파렐...”이라고 노래하지만 이제 영웅은 대답할 수 없는 곳으로 가려는 것 같다. 그러니 이 노래는 더 이상 대답할 수 없는, 소멸해버린 영웅을 향한 연가처럼 들린다. 마지막 장면은 영웅의 마지막 시간을 초시간적인 형상으로 봉인한다. 이것은 소멸한 반란에의 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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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징 오브 더 문>은 두 영웅의 이야기가 ‘1분간 정차’의 잉여적 세계를 감싸고 있는 기묘한 구조의 옴니버스 영화다. 나는 그 가운데 담긴 ‘1분간 정차’에 이 영화의 비밀이 있다고 느낀다. 소재로서의 반란이 아니라 텍스트 스스로가 반란이며 실험인 영화를 존 포드는 예순을 넘긴 나이에, 그리고 아직 뉴웨이브의 소란이 도착하기 전에 만들었다. 이 영화 역시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해온 포드의 또 다른 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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