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종전 직후 수작 <
데이 워 익스펜더블>(1945)과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1946)를 잇달아 내놓은 존 포드는 마음속에 오래 품어온 영화 한 편을 완성한다. 그래엄 그린 Graham Greene의 소설이 원작이며 우울한 떠돌이 성직자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어떤 제작자도 원하지 않는 프로젝트였다. 여기엔 결투도 로맨스도 없었으며 멕시코 올 로케이션 촬영이어서 제작비 부담도 컸다. 포드 자신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릴 자눅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이건 돈을 걸만한 상업영화가 분명히 아니야. 하지만 내 심장과 믿음은 이걸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이 영화를 위해 포드는 폭스의 연봉 60만 달러 계약을 거절하고, 자신의 프로덕션 브랜드인 아고시 Argosy를 법인화해 직접 제작에 나섰다. 결과는 처참했다. 아고시는 1백만 달러의 빚을 짊어지게 되었고 이 영화가 성공하면 포드의 또 다른 개인적 프로젝트 <
조용한 사나이>를 지원한다는 RKO와의 계약도 무용지물이 됐다. 포드가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거의 전부 뜯어고치는 바람에 시나리오 작가 더들리 니콜스와의 사이도 틀어졌으며, 원작자 그래엄 그린도 “포드의 아일랜드식 카톨릭주의 때문에 내 원작이 희화화되었다”며 비난했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도 멀어져갔다. 평자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나쁜 편이었다. 포드의 열렬한 지지자인 린지 앤더슨조차 이 영화가 “과도하게 장식적이고 감상적”이라고 평했고 장 미트리는 “이론적 리얼리티를 지닌 이론적 드라마이며... 탈개인적이고 차갑다”고 비판했다. 오직 포드 자신만이 이 영화의 유일한 변호인이었다. “나는 이 영화 보는 게 즐겁다. 내게 이 영화는 완벽하다.”
무엇이 포드 스스로 ‘완벽’이라는 단어까지 쓰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가 왜 그토록 폄하되었는지도 짐작하기 힘들다. 1997년 이국 도시에서 낡은 VHS 테이프로 이 영화를 처음 만났을 때의 놀라움을 아직 기억한다. 우울한 표정의 한 사내가 대의도 명분도 없이 죽음을 향해 느리게 걸어가고 있었다. 영화는 줄곧 어둠과 불안으로 가득했고, 죽음 직전에 이르러서야 사내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았다. 이게 정말 존 포드 영화인가? 사내의 선택에 관한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지만 그 선택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다. 형언하기 힘든 압도적인 공기가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 영화가 재발견을 기다리는 포드의 걸작 가운데 하나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남자가 들판을 지나 무너진 성벽을 넘어 무엇엔가 쫓기듯 비틀거리며 달려오고 있다. 그가 이 영화의 영웅인 신부(헨리 폰다)이다.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다. 포드의 어떤 영화에서도 영웅의 등장이 이토록 불길하고 초라하지 않았다. 장면이 바뀌면 그는 아치형의 기둥이 끝없이 도열해 있는 회랑을 지나서 걸어온다. 다음 장면에서 그는 말이 아니라 노새를 타고 마을을 향해 간다. 그리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이 영화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진실의 이야기를 다룬다. 성경에서 시작된 옛날이야기이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주제이며 세계 여러 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영화의 촬영지는 멕시코이며 멕시코 정부 및 영화계의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배경이 된 마을은 적도와 멀리 떨어진 허구의 공간이다. 누가 알겠는가.”
포드의 영화적 무대는 대개 미국의 서부이거나 아일랜드의 마을이었으며, 지리적 좌표와 역사적 시간과 연루되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
도망자>는 자신의 예외성을 처음부터 공표한다. 여기엔 특정한 시대와 장소도 지정되지 않고 신부를 비롯해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이 자의식적 우화의 원본은 그래엄 그린의 소설 이전에 신약성경이다. <
3인의 대부 Three Godfathers>가 서부극의 세팅 위에서 예수 탄생기를 원용했다면, <도망자>는 초시대적 알레고리로 예수의 최후를 우울증적 서사와 표현주의적 영상으로 번안한다.
도입부 장면으로 돌아와 보자. 정체불명의 마을에 진입한 사내는 언덕 위의 폐건물과도 같은 버려진 성당으로 들어간다. 이어지는 3분여의 짧은 성당 숏 안에 포드는 극도의 간결함과 압축미로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을 단번에 드러내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한다.
신부는 긴 그림자로 성당에 입장한다(#1). 실루엣으로만 그의 모습이 드러나며 카메라 위치를 반대로 잡은 장면에서도 그는 여전히 검은 실루엣이다(#2). 그는 그림자 혹은 어둠의 존재이다. 그의 지친 듯 얼빠진 표정이 드러나면(#3), 그에게 드리워진 어둠이 그가 단순히 도망자라는 신분을 은유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의 상실과 밑 모를 불안이라는 내면의 표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대형 십자가도 성상도 없는 성당에서 그를 맞은 건 부서질 듯 왜소한 나무 십자가들이다(#4). 남자의 뒤를 따라 성당에 들어온 여인 마리아 돌로레스와의 만남 장면에서 그의 불안한 존재감은 더 강조된다. 여인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으로 둘러싸이지만 사내는 여전히 어둠 속에 묻혀 있다(#5). 이 명암 대조는 관습적인 조명법을 교란한다. 신부는 어둠의 편에 여인은 빛의 편에 속해 있는 것이다.
여인이 묻고 남자가 대답하는 짧은 대화가 이어진다.
“누구세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여기가 내 집이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이 마을 남자들은 내가 다 알아요.”
“........................”
“혹시 경찰인가요?”
“경찰을 피하고 있습니다.”
“범죄자인가요? 도둑질하거나 살인을 저질렀나요?”
“아닙니다. 난 신부입니다. 내 성당이지요.”
이 단문의 대화만으로도 이 상황의 모든 것이 단번에 드러난다. 아이를 안은 여인은 창녀이고 남자가 로마군에 쫓기는 예수처럼 경찰에 쫓기는 신부이며 몇 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여인이 “교회가 다시 열리나요?”라고 묻자 사내는 “아마도요”라고 대답한다. 여인이 “세례를 못 받은 아이들이 많아요. 그래서 신부님이 여기 오신 건가요?”라고 묻자 사내는 역시 “아마도요”라고 대답한다. 사내는 자신이 이곳에 온 돌아온 이유와 자신이 할 일을 정확히 말하지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매춘부인 여인은 지금 빛을 받으며 구원자의 자리에 서 있고, 신부인 사내는 범죄자처럼 어둠 속에서 무언가 망설이고 있다.
창녀=구원자라는 암시가 <
역마차>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일곱 여인들 7 Women>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
도망자>는 무엇보다 먼저 <
젊은 날의 링컨>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내의 망설임 때문이다. 역시 헨리 폰다가 연기한 젊은 링컨에게서 우리가 보았던 것은 망설이듯 전진하는 우아하고도 기묘한 움직임이었다.(4회 참조) <젊은 날의 링컨>애서 자신의 선택이 자유의지인지 운명의 간계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공동체 영웅, <도망자>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성직자는 동질의 인물이다. 그들을 일반적 대중영화에서의 고결한 속인과 대비되는 범속한 성인(聖人)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존 포드의 영화를 특징짓는 것 중의 하나가 그 범속성의 몸짓이다. 그들에게 종교적(혹은 공동체적) 소명은 고결한 사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감옥이다.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대의에 투신하는 게 아니라 대의의 실행자라는 자리에 불려 나온 것이다. 하여 그들은 종종 그 자리에 가기를 원치 않는 듯 느리게 움직이고 엉뚱한 심술을 부리며, 불안과 공허의 몸짓으로 프레임을 채우고 때로 자신의 지위를 부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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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의 사내에게 목숨을 걸고 자신의 교회로 돌아온 결단과 “아마도요”라는 망설임의 발화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도요”라는 말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소극적이고 우회적이지만 그러나 완강한 부인의 몸짓이다. 사내가 신부임을 알게 된 마리아가 몸을 숙여 그의 손에 입 맞추려 하자, “그러지 마세요”라고 만류한다. “그러지 마세요”라는 말은 이후에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그는 지금 성직자의 임무를 위해 돌아온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계속 부정하려 한다. 정확히 말하면 짧은 순간이나마 소명을 잊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의 슬픔에 젖은 표정과 느린 동작, 낮고 우울한 목소리는 그 시도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임을 동시에 암시한다. 그는 다시 소명을 부인하고 탈출을 시도하겠지만 결국 실패할 것이다. 이 영화는 그 덧없는 시도의 여정이 될 것이다. 아름답고 불안하며 고요한 성당 장면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예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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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를 보고 로베르 브레송의 <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1951)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신에 대한 믿음을 회의하고 불안이라는 질병에 시달리는 성직자, 그를 폄하하고 부정하는 환경, 사제의 죽음이라는 귀결 등은 물론이고 에피소드 병렬의 구조, 연극적인 말투와 연기, 인물의 텅 빈 표정과 동작에 대한 모더니즘적 몰두에서도 공통적이다. 하지만 이 유사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는 없다.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는 종교적 외피 아래 숨겨진 리비도가 점액질의 촉감을 만들어내지만, <도망자>는 엄연히 고전적인 캐릭터 스터디의 면모를 갖고 있다. 일견 포드적인 것과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망자>는 포드적인 세계의 또 다른 표현이다.
여기엔 신부 외에도 두 사내가 더 등장한다. 신부를 추적하는 장교, 그리고 현상수배범 그링고(워드 본드)이다. 돈을 밝히고 천박한 총독 일당에 비하면 장교는 잔인하지만 품위 있는 혁명가이다. 그는 내세의 구원을 경멸하고 현세의 행복을 부르짖는다. 우연히 마을에 도착하는 무법자 그링고는 내력이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서부극의 전형적 인물이다.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신부의 탈출을 돕다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다.
세 인물의 공통점은 고결함 혹은 금욕적 프로테스탄트라는 점이다. 이 점이 근본적으로 관능적인 브레송과의 차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모두 실패한다는 것이다. 무법자는 총 맞아 죽고 신부는 사형대에 오른다. 장교는 세속적 승리자이긴 하지만 그가 부르짖는 행복한 공동체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되며, 신부를 총살할 때 그의 가책의 몸짓은 그 실패를 예감하는 것처럼 보인다. 포드는 세 인물을 유기적으로 엮는 서사에는 무관심하다. 대신 세 인물을 한 공간에 모아놓고 그들의 선택과 행로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세 사내는 서부사나이를 셋으로 나눠놓은 것 같다. 우울하고 불안한 성직자, 잔혹하고 강인한 혁명가, 무도하지만 따뜻한 무법자. 세 인간 유형은 실은 동일한 존재의 변주들이다. 자신의 신념 혹은 운명이라는 감옥에 갇힌 자. 포드의 서부사나이는 바로 그런 인물이 아니었던가. <
도망자>를 그런 점에서 포드적 영웅의 해부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해 포드적인 것과 가장 멀어 보이는 이 영화야말로 포드적 세계의 훌륭한 입문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엔 그가 사랑한 인물들의 어두운 심연이 있고, 강렬한 표현주의적 영상과 아름다운 구도가 있으며, 실패한 구원의 서사가 있다. 다만 여기엔 포드가 그토록 사랑한 것처럼 보였던 유머와 헛소동이 없다. 포드는 왜 이 영화를 두고 ‘완전한’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2차 대전의 체험이 그의 마음을 유희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일까.
이 질문은 제대로 답해질 수도 없고 실은 불필요한 질문일 것이다. 평자로서 말할 수 있는 건 창작자의 의도가 아니라 그의 작품 자체일 뿐이다. 대신, 이 질문과 간접적으로 연관된, 영웅의 선택의 과도함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신부의 선택은 표면적으로 과도하다. 죽음 직전에 이른 한 사내의 마지막 고해성사를 위해 그는 자신이 방금 탈출한 곳으로 목숨을 걸고 되돌아간다. 두 번 스치듯 만난 것 외엔 어떤 인연도 없는 한 사내(신부는 이 현상범이 자신의 탈출을 도왔다는 사실을 모른다)의 구명이 아니라 고해성사가 자신의 생명을 걸 만큼 중대한 소명일까.
이 대목은 전 회에서 말한 <
태양은 밝게 빛난다>를 고스란히 상기시킨다. 걸려 있는 것이 목숨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라는 사실 때문에 얼마간 가려지긴 했지만, 프리스트 판사에게 장례식 주재라는 행위의 사소성에 비해 너무 큰 희생의 결단이 요청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상황과 행위의 비대칭, 다시 말하면 상황의 과소함과 그것이 요청하는 행위의 과도함의 불균형이라는 문제가 여기에 있다. 고전적 할리우드영화의 도식이 S-A-S′(문제적 상황-해결의 행위-개선된 상황)라면 포드의 두 영화에서의 도식은 s-A-s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과 끝의 소문자 s는 과도한 행위를 요청한 상황이 영웅의 행위 이후에도 근본적으로 변함없다는 사실을 표시한다.
이 도식은 두 서사에서 결국 행위를 표시하는 대문자 A가 가장 문제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를 말하면서 이를 ‘도덕과 윤리의 불안정한 동반에서 윤리만이 문제되는 상황으로의 이행’으로 요약한 바 있다. 그런데 <
도망자>를 보고 나면 이 수정된 도식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느껴진다. 신부는 첫 시퀀스에서 돌아온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그 이유를 신부가 다시 탈출한 뒤 은신처에서 의사에게 하는 말에서 들을 수 있다. “자만에 도취해서 생각했어요. 혹시 알아? 순교자가 될지.” 그에게 순교라는 선택은 상황으로부터 독립적이며 그 자체가 자기목적적인 행위이다. 신부를 되돌아가게 만든 죽어가는 이의 고해성사는 바로 이 순교를 위한 일종의 도구라고 볼 수도 있다. A는 s는 직접적인 연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도식은 s…A…s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순교 혹은 최종적 결단의 자기목적성, 자기충족성은 정말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자기완결적 행위인가. 오히려 우리가 포드의 영화에서 보는 건 공동체의 완고한 부도덕의 표정, 세계의 되돌릴 수 없는 타락의 그림자, 혹은 순교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회의의 몸짓이 아닌가. <
도망자>를 지배하는 그림자와 폐소공포증적 어둠, 그리고 불안한 말투와 망설임은 그것의 표상이 아닌가. 세계는 바뀌지 않는다. 영웅은 결단했지만 창녀들은 예정대로 추방되었고(<
태양은 밝게 빛난다>), 마을은 잔인한 혁명가가 그대로 지배한다(<도망자>). 영웅의 결단 이전과 이후의 상황이 동일하다면 그 견고한 s야말로 세계의 진정한 주인이고 궁극적 행위자이며 영웅의 행위는 순교든 희생이든 부질없는 몸짓에 불과하다. 정말 과소한 것은 A이다. 그렇다면 이 도식은 다시 수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S)-a-(S)로 표시될 수 있을 것이다.
S-A-S′의 여러 변형 도식들로 말하려는 건 그들의 분석적 효용성이 아니다. 포드의 어떤 영화에서도 고전기의 원형적 도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S와 A는 끊임없는 불안정과 비대칭의 관계에 놓인다는 것이다. 종종 뒤돌아 떠나는 영웅의 뒷모습으로 은유 되는 주인공의 죽음은 이런 물음을 남긴다. 그것은 과도한 A, 혹은 과대망상적 행위의 증상인가. 아니면 과소한 a, 혹은 행위의 근본적 무기력의 증상인가. 이 물음은 포드 영화 이력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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